연극 <사물함>
연출 : 구자혜 / 작: 김지현
출연: 김윤희(다은), 이리(한결), 정연주(연주), 정원조(재우), 조경란(혜민)
주최, 제작 : 국립극단
부끄럽지만 처음 예매할 때, 청소년극이라고 해서 정말로 청소년이 출연하는 극인줄 알았다. 오늘 프로그램북을 보는데 연출의 말에 '무대에서는 누구나 될 수 있으니까요'라고 쓰여있길래 새삼 부끄러워지더라. 그래 무대에서는 아무나 될 수 있는데 왜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을까..
다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극은, 사실 조금 어색한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국립극단 특유의 사실반극적반 느낌의 작품. 국립극단에서 올라오는 작품들은 <말뫼의 눈물>에서도 그랬듯, 적당히 사실적이면서도 적당히 극적인 무대연출을 하는 작품을 선호하는 듯. 물론 아닐수도 있겠지만. 내 느낌이다! 나는야 편견왕!
/ 청소년극 /
<사물함>의 모든 등장인물은 청소년이다. 그들은 모두 강한 계급성을 띈다. 한결은 건물주의 딸, 다은은 청소년알바노동자, 연주는 다은과 (아마도) 비슷한 입장의 친구, 재우는 중산층 부모의 아들, 혜민은 자영업자 편의점주 부모의 딸. 그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부모와의 연결성, 의존성이 강하게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객체로 그려진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극'이라는 타이틀을 단 것에는 손색없었다는! 아주 긍정적인 평을 내린다. 보통 '퀴어극', '여성극' 처럼 소수자성을 강조한 극에서 캐릭터들이 그들의 소수자성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물함>에서는 그런 점에서 매우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 사물함 /
사물함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다은이가 먹다 남긴 폐기? 급식에서 남아서 싸온 음식? 물에 젖은 체육복?
제목만큼 극에서 사물함에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아쉬움은 제목 그 자체에 있다. 다은이의 죽음이 너무나 명백한 책임소재를 향하고 있는 이상, 그의 사물함이 그렇게나 큰 물음표가 될까? 왜 하필 사물함을 제목으로 삼았을까.
아마도 연주가 한결, 재우, 혜민 사이에 들어오는 계기, 그들의 굳게 닫힌 사물함 같은 계급성을 뚫고 들어오려는 것을 표현했던 것 같은데, 음 적절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일부러 혜민이가 사물함 비밀번호를 바꾸지만 그들에게 파고들려는 연주는 어떨까?
/ 무대, 배경음 /
사다리꼴 무대. 3면으로 둘러싸인 좌석이 특이했다. 왜 굳이 사다리꼴로 만들었을까? 사다리꼴 무대가 쓰인 이유를 잘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냥 지금 생각하기로는, 직사각형이 되지 못한 불안정한 사다리꼴을 표현하려고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만. 맞나? 아, 그리고 무대구성이 신기했음. 장소가 뒤섞이고, 오르내림이 자유로웠다.
요즘 본 극에서는 음악이 감정선에 따라 표현되는 연출들이 많았었는데, <사물함>에서는 장소가 바뀜에 따라 배경음이 달라지는 정도였다. 그래서 오히려 재밌었다는? 하지만 배우들 감정선이 그렇게 섬세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경음마저 잔잔하니까 살짝 건조한 느낌이 들긴 했다. 음...연기합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 그 빈 공간을 연출적으로 채워줬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오히려 극작에 집중할 수 있었나보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 보다는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장점 아닌 장점?
/ "네가 죽었어도 이렇게 조용할까." /
극작은 사실 완성도있다고 보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너무 직접적인 말과, 문어체적인 말투가 조금 거슬렸다. 그리고 중의적인 대사를 사용할 때, (ex. 한결이 게임하다가 "너 때문에 죽었잖아!"라고 할 때) 살짝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일부러 그 장면을 넣으려고 저 대사를 썼구나, 하는 느낌? 다만 그 장면장면들을 잇는 연출이 좋았다. 특이했던 건 장소가 바뀔 때 인물들이 서 있는 장소와 조명이 바뀌면서 그들의 미묘한 긴장이 드러났었다. 혜민이 사다리꼴 경계에 서 있다가 다은이 중앙으로 등장해서 혜민과 다은의 연결점을 드러낸다든지, 아니면 마지막에서 그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상태에서 다은이가 중앙에 들어온다든지 하는 것들? 공간 활용이 좋았음.
아무튼, 네가 죽었어도 이렇게 조용했을까 라는 말은 사물함을 관통하는 말이다. 캐치프레이즈로도 사용됐던 대산데, 한결이네 할아버지가 소유한 건물에서 편의점을 하는 혜민이, 그 사이에 있지만 아무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자기 일상을 지키려는 재우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대사다. 자본가와 자본가의 편에 선(노동자에게서 등돌린) 자영업자, 그리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중립을 지키려는 중산층 모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동시에 연주는 그들과 같은 계급으로 평가받고 싶어하기도 한다. 연주는 이런 현실을 마치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대한다. 그럼에도 그들과의 연줄을 놓고싶지는 않았겠지. 연주의 이중적인 마음과 한결, 혜민, 재우의 자본가적 태도는 암암리에 부딪히여 극의 긴장을 쌓아간다.
/ 총평 /
물론 배우들의 연기합이 매끄럽지 않았고, 감정선 처리가 섬세하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극작 역시 완성도 높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이 의미있는 것은 그 불안정한 덩어리들을 이어가는 장면전환과 '청소년극'이라는 소수자성을 큰 비판점 없이 잘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일부러 '고딩'스러운 워딩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도 꼭 청소년스럽지 않기 위해서 선택했던 어투였던 것 같다. 배우들 역시 일부러 소위 '청소년'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많은 행동언어를 고민했던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좋았다.
한 마디로 소수자극으로는 배울 점이 많다! 볼까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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