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우스>
제작: 극단 실험극장, (주)수현재컴퍼니
작: 피터 쉐퍼 Peter Sheffer / 역: 신정옥 / 연출: 이한승
출연: 안석환(다이사트), 정휘(알런), 이서림(해스터), 서광일(프랭크), 김효숙(도라), 한은비(질)
TK 수업에서 곧 에쿠우스를 다룰텐데, 내용도 뭣도 몰라서 일단 보자!하는 생각에 무작정 예매했던 <에쿠우스>. 시험 끝나고 두번째 관극이라 아직 극 보는게 쌩쌩하다. 역시 아직까진 현생보단 극이라, 극이 현생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잡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음. 그치만 내 꿈인데 어떡해!
아무튼,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관극을 하니 힘이 솟아나는 기분. 신나게 관극 다녀와서 카톡회의 한 판 하고 맥주 마시면서 쓰는 후기란....정말 인생을 보람차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함ㅋㅋ이런게 보람찬거면 진짜 세상 살기 편하겠군. 어따 써먹을지 모를 학점 관리보단 차라리 관극후기 상세하게 쓰는 게 내 인생에 훨씬 도움 되니까 뭐.
아, 이걸 꼭 기록해놔야하는데 관극 전에 재밌는 해프닝이 있었음. 에쿠우스 플북을 사려는데 현금으로만 결제가 된다는 것임. 40주년 기념 공연이라 그런지 플북에 에쿠우스 관련 지난 공연 자료나, 여러 분석문이 들어 있는 좋은 플북이었데 하필 오늘 현금을 안 들고 갈게 뭐냐. 아쉽게 포기하고 플북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아저씨가 뒤에서 툭툭 치더니 계좌이체! 하면서 플북을 내 품에 턱 안겨주는 거 아닌가? 너무 당황해서 응 뭐지 이 분(왠지 어디서 본 것 같으다?)하면서 아아 하는 사이에 에쿠우스 플북은 내 손에 고이 담겨있고 그 분은 내 티켓봉투에 계좌번호를 써주시면서 이체하라고 계좌번호를 써 주심. 감사한 마음에 바로 이체 하는데...!아니 성함이 이한승????아니 대표님 왜 여기에 계시는거예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아니 극단 대표님이시니까 여기 계시겠지만 너무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타나서 너무 자연스럽게 계좌이체를ㅋㅋㅋㅋㅋ참.....이 기회를 천운삼아 나 연극하고 싶다고 어필할까 했는데 대표님 너무 바쁘셔서 인사만 건네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쉽.
아무튼간 그래서 덕분에 관극 잘 했고, 플북을 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치만 기대하고 봤던 에쿠우스는 생각보다 정말 내 취향 아닌 극이었고, 이런 주제를 가진 극이 브로드웨이에서 <세일즈맨의 죽음> 최장공연 기록을 깼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차근차근 말하겠다. 이번에도 역시 내맘대로인 분석/감상 카테고리를 통해서!
1. 무대
원형무대, 가운데 사각형의 플랫폼이 있고 그 주변 공간이 다이사트가 독백하는 공간. 그리고 그 영역 밖에 배우들이 대기하는 공간이 있음. 그래서 배우들은 등장하지 않을 때에도 무대 위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음. 연극이 실제가 아니라 ‘연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배우의 캐릭터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이런 형태의 원형무대를 만들었다고 하더라. 흥미로웠다.
2. 말!
제목이 ‘말’인 만큼, 이 극에서 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작에 사람이 사람스럽게 보이는 동시에 말을 나타내야 한다는 어려운 주문이 있는 만큼 <에쿠우스>를 잘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이 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도 있겠다. 2018년 실험극장 프로덕션 <에쿠우스>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닥이었다.
연극 <선을 넘는 자들>에서 dmz에 사는 사슴을 사람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 때 사슴배우의 근육만큼 말배우들의 근육이 짐승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사슴과 말은 근육이 다르고 연출해야 하는 느낌도 다르지만, 말 특유의 힘찬 근육과 묵직한 위압감, 그와 동시에 느껴져야 할 날렵함이 조금씩 모자랐달까. 그건 아마도 경직된 말들의 몸짓 때문일수도 있겠다. 말들의 동작이 더 무겁게 느껴졌으면 좋았을걸. 다그닥거리는 말 특유의 몸짓과 투레질하는 소리, 그와 함께 나오는 고갯짓을 참 잘 살렸어서, 말들이 백에서 무대로 등장하는 순간마다 보는 맛이 쏠쏠했지만, 이내 재미가 깨지곤 했다. 말이 알런을 압도하거나 알런이 말을 종교적으로 대할 때마다 말이 팔을 들어 엑스자로 교차하는 그 행동을 보였는데, 그 행동은 뜬금없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종종 몰입을 방해했던 것. 대체 그 팔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극작에 나온 동작인건지, 아님 안무가가 만든 동작인건지 궁금했다. 극작에서 명시된 동작이라면...종교적 색채를 최대한 살리려고 그랬을 거다, 고 최대한 좋게좋게 이해할 수는 있겠다만 안무가가 짠 동작이라면.....음.
아무튼, 코러스들 몸이 매우 좋았고 눈호강을 톡톡히 한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정말 말처럼 보였냐는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 동작 때문이 아닐까. 뭐 굳이 좋았던 점을 꼽자면 1막 마지막 장면, 알런이 밤의 들판을 달리며 말과 자신만의 종교적 행위를 했던 그 해방씬? 연출은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 뻔하고 올드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며, 배우 말이 안 들려서 절정이 절정답지 못했다는 게 흠이지만(이 정도면 다 흠인가) 그냥 말은 좋았다. 물론 안무가 살짝 올드하기도 했지만...좀 더 현대무용스러웠으면 좋았을걸. 차라리 내달리는 움직임을 강조하던지. 무거운 몸이 내달리면 얼마나 멋진데 말야.
3. 극 주제
이성, 인간, 정장, 아폴로, vs 본능, 짐승, 나체, 디오니소스
참 진부한 이분법이고, 참 진부한 저항이다. 이성과 본능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서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정말 전형적인 서양식 이분법 철학으로 점칠된 상징들. 지긋지긋하다 정말!! 왜 이런게 명작인거야! 차라리 세일즈맨의 죽음이 훨씬 더 낫다! 그 속에선 적어도 정신과 육체를 나누는 짓거리는 하지 않아!!!그리고 윌리한테는 현실인식이라도 있단 말이다. 알런은 현실 인식은커녕 자기인식조차도 못하고 그냥 다 싫다고 찡얼대면서 말이나 타고 앉았고. 하, 알런은 정말 자기가 있는 힘껏 살아본 적이 있을까. 종교인 어머니와 사회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알런이 배운 것은 정말로 이상 덩어리에 불과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까먹었다 무슨 성경 속 인물이었는데)~의 아들 에쿠우우우우스!!라고 하는거겠지. 알런한테는 자기가 없으니까. 그 두 이상 사이에서 태어난 저항 덩어리. 인간의 본질엔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차라리 인간보다 짐승을 신격화하는 대안을 택했던 바보같은 알런. 그리고 그런 알런을 부러워하는 다이사트. 뭐냐 이게. 종교랑 사회주의에서 이상을 찾을 수 없으니까 차라리 말을 최고가치로 삼자고? 이 바보 같은 수동적 회의주의는 도대체 어디서 생성된걸까. 이런 주제를 가진 극이 <세일즈맨의 죽음> 최장공연 기록을 깼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열이 안 풀려서 덧붙이자면, 사실 현실은 알런이 생각하는만큼 이성중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하는 저항은 소위 일기쓰기식 한풀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혼자서 몰래, 그것도 밤에, 아무도 보지 않는 들판을 열받아서 나체로 말 타고 뛰어다니는 행위가 저항인가? 그냥 열 받을 때 노래방에서 한 시간 동안 소리지르는 행위의 고급진 버전 아니냔 말이다. 거 참 이해할 수 없어..독하게 말하자면 이건 그냥 자위다. 뭐 진짜 말한테 성애적 감정을 갖는 것 같기도 하다만....그걸 떠나서 이건 그냥 정신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고.
4. 연기
정휘 배우님 발성이 좋지는 않더라. 1막 마지막 장면 시원하게 터져나와야 할 카타르시스가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정휘 배우 목소리가 안들렸기 때문. 빠르게 회전하는 회전무대, 점점 커지는 배경음 볼륨, 시원하게 내달리면서 무대를 가득 압도하는 말들!!!!그들이 내뿜는 거대한 에너지를 그대로 받아올려 시원하게 내질러야 할 알런의 외침이!!!!!전혀! 들리지 않았다! M열에 앉았었는데, TOM관 그렇게 크지도 않은 극장에서 왜 그렇게 뚫지를 못하니. 1막에서 터지지 못한 절정은 2막에서도 그냥 그렇게 이어졌다. 정휘 배우, 마스크랑 바디는 참 알런스러웠는데 조금씩 모자라서 아쉽더라. 난 좀 더 광기어리고 더 섹시하고 더 저항적인 알런을 보고싶었는데.
그리고 안석환 배우님 살짝 올드한 연극투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어투.
5. 기타....그리고 최종감상
관객들 수준이 너무 별로였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막 엄청 고급진 관극러는 아니다만 최소한 관극 예의는 지켜줘야할 것 아닌가. 말 대신 사람이 나온다고 오와 히익 하는 숨소리를 내지 않나, 키득거리면서 웃질 않나, 자기가 좋아하는 장면에서는 옆 사람하고 소곤소곤 얘기하질 않나, 심지어 반딧불이도 있었다. 와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무대에서는 알런이 ‘자위’하고 있지, 그 옆에선 다이사트가 알런 부럽다고 하고 있지, (뭐가 부럽냐 멍청아!) 말은 이상한 안무나 추고 앉았지, 배우 말은 안 들리지! 관객들은 떠들지!!
화가 났다. 그것도 정말 많이. 관극 한 지 4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난다. 이따위 자위극이 명작 반열에 올라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포스트모던 지난지가 언젠데 아직도 데카르트적 이분법 얘기하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그 속에서 뭘 뽑아먹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난 이런 회의주의 가득한 극 진짜 싫다. 다음 주 수업에 에쿠우스 다룰텐데, 그 때는 또 어떤 마음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2018년 실험극장 프로덕션 <에쿠우스>는 별로였음. 뭐, 다음 주 수업 후에는 또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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