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기록의 고고학>
기획 및 제작 : 가청주파
Ep1. 생기부는 무슨 체로 써야 하나요?
대본 및 연출 : 전지욱 / 출연 : 최혜정, 한아름솔, 이연주
Ep2. 동네
대본 및 연출 : 강남 / 출연 : 구시연, 한혜진, 남태훈, 배수진, 백유진
(관극 일시 및 장소: 18.09.07 19시30분, 언더스탠드 에비뉴 아트스탠드)
별개의 에피소드 두 개가 1, 2막으로 나눠서 진행되는 방식의 연극이다. 시간에 딱 맞춰 들어가서 핸드폰을 끌 타이밍도 없었다.
1막 내내 핸드폰이 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집중을 못했다. 아쉽
공연은 꽤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다룬다. 하지만 적당한 완급조절로 보는 사람이 지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텀블러 후원으로 받아 온 대본집과 공책은 책꽂이에 얌전히 전시해놨다. 소위 '밀당'에 성공한 좋은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
(급히 들어가느라 티켓샷도 못 찍고... 공연 끝나고 나오면서 찍은 컷 하나만 남았다ㅠㅠㅜㅜ흑흑)
Ep1.
생기부는 무슨 체로 써야 하나요?
/ 진짜 나는 누구인가 /
ep1에서는 자소서에 쓰인 나는 과연 진짜 나라고 볼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나를 꾸며내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생기부 작성 컨설팅을 받으러 온 혜미. 그리고 혜미와 같은 꿈을 꾸고 작가의 길을 걸어보려 했지만 간호학과라는 꼬리표 때문에 성공적인 데뷔에 실패한 후 컨설턴트를 하고 있는 유나.
혜미는 컨설팅 도중 체계적인 생기부를 위해 자신이 진짜 좋아했던 걸 포기해야했던 재희를 떠올리며 감정에 북받친다. ‘이런건 다 가짜잖아요. 이런 종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라며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는 혜미. 확실히 아직 현실을 맛보지 않은 고등학생이 할 법한 말이었지만 혜미가 얼마나 순수하게 시를 좋아했고 유기견 봉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봤던 우리는 그 뻔한 연설에도 마음이 움직였다.
만약 극작이 여기서 그쳤다면 흔한 교훈적인 스토리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더 현실을 보여준다. 혜미와 같은 꿈을 꿨던 성인동화작가 지망생 유나를 통해 ‘그럼 진짜는 뭔데?’라는 물음을 던진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도 똑같이 자소서에 무엇을 써야하는지 고민하고, 자소서 안에 들어있는 물감으로 뒤덮인 예쁜 핑크빛 강이 과연 '진짜' 나인가 물으며 괴로워한다. 아마도 삶을 살면서 평생 느껴야 할 괴리감을 동화적으로 잘 표현했다.
/ 재밌었던 점 /
- 관객을 잘 끌어당길 수 있는 귀여운 포인트들이 있었다. 작은 소품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 핑크빛 조명이 너무나 예뻤다. 화가의 옷, 그림의 색감이 어우러져서 극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 다양한 동선 활용. 혜미와 재희 화가가 책상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무대를 활보하고 다닌다. 단상 위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책상 위로 올라가고, 공책을 엎었다가 손에 들고, 의자에 기대 반쯤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거나,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기도 한다. 적은 소품으로 많은 장면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는데, 극의 연출적 분위기를 아주 귀엽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고 생각한다.
Ep2.
동네
/ 전환 /
캐릭터 전환극을 굉장히 좋아해서, 한 배우가 여러명을 연기하는 극을 일부러 골라보는 편이다. 모르고 갔는데 에피소드 2 '동네'도
캐릭터 전환 형식이라는 설명을 보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고정 캐릭터가 나오는 장면도 있었고 젠더프리로 진행된 장면도 있었다.
(1) 이성을 연기할 때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자를 여성 배우가 연기할 때 목소리를 일부러 굵게 내거나, 여성 간호사를 남성 배우가 연기할 때 몸을 살짝 흔든?다거나. 이런 방식의 표현은 사실 성별 이분법을 고착화시키는 나쁜 표현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앞으로 지양되었으면 한다.
(2) 기억의 잔상
"그들은 재난을 마주한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며, 재난을 마주한 것은 사람만은 아니기에 동식물, 건축, 자연에 이르는 모든 것으로 분할 수 있다. 각 장의 모든 것은 장을 이끌어가는 화자의 기억 속에 남겨진 파편 같은 잔상이다"
대본에 쓰여있는 등장 인물에 대한 설명이다. 등퇴장이 명확하지 않고 시공간이 때때로 바뀌는 전환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단지 캐릭터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장면이 바뀌는 연출에서 조명과 큐브, 소품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그림을 자연스럽에 이어갔던 것 같았다. 화자가 나레이션 하는대로 관객을 이끌려갔다.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이미지를 그려가는 극.
/ 기억에 남는 장면 /
- 원전 사고 이후 사고 수습을 위해 펌프 기사, 잠수부, 광부들이 나선다. 콘크리트 석관으로 발전소를 덮기 위해 3500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대부분 사망했다. 그들이 연쇄적으로 죽고 다시 일어나고 죽음이 덮어지고 다시 새로운 사람이 투입되는 일련의 과정을 동그랗게 둘러싼 세 배우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다시 쓰러지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쓰러지고 일어서는 배우들의 모습이 바로 앞에서 재연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 끔찍한 죽음의 수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총평
다시 한 번 올라왔으면 하는 바람. 단 3일 간의 공연으로 끝나기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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