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rma>

 

 

영국 National Theatre 2016년 프로덕션, Simon Stone 연출, Federico Garcia Lorca , Billi Piper 주연

 

(관극 : 18. 03. 27,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국립극장에서 NT Live를 상영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이리저리 재밌는 극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품이었는데 트레일러가 매우 흥미로워서 충동적으로 예매. 극장에서 스크린을 띄우고 공연을 상영 한다는 게 재미있어서 처음 도전해본 관극(-이라고 하는게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공연 실황을 촬영한 건 맞으니까-)이었다.

 

  

자리는 고민하다 달오름극장 F열을 선택했고, 나쁘지 않았다. 다만 스크린이 예상보다 컸고-무대부터 실링바 바로 아래까지 전부 스크린이었다! 마치 아주 좋은 옛날 영화관에 온 듯한 기분-, 배우의 얼굴이나 몸 전체를 클로즈업에서 촬영한 부분이 많았어서 F열보다 더 뒷자리를 선택했어도 좋았을 것 같았음.

 

 

 

예르마는 보고 나와서 매우 진빠지고 혼란스러웠던 극이었기 때문에...나름대로 극에 대한 감상과 분석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에 플러스 현생이 너무 바빴음ㅠㅠ이번 주에 책만 4권 읽어야 했단 말이다) 영화적인 기법이 사용된데다가, 시간의 흐름을 장면장면으로 끊어서 제시해주는 형식이었던만큼 서사를 따라가면서 극을 이해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서사가 아닌 몇 가지 키워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혹은 특징적이었던 요소들을 통해 감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유리벽 /  예르마의 삶을 단층적으로 보여주는 장치

 

 


 

극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부분은 무대 가장가리가 유리벽으로 막혀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앞에도 언급했듯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유리벽이 어떻게 세워져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음. 처음엔 사각형 무대 위에 4면 모두 유리벽을 세워서 어항 같은 구조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상하수로 등퇴장을 하는 걸 보니 어딘가 뚫려있긴 한가보다. 아마도 관객이 보는 쪽 두 면에만 유리벽을 설치했던 것 같다 (예르마는 무대를 가운데에 놓고 관객석으로 앞뒤로 배치함)

 

 

 특이했던 점은 배우들이 벽 너머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 마지막 예르마가 죽는 순간까지도 예르마는 관객을 보지 않는다. 독백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이 부분과 연결되는 특징인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유리벽이라는 장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기분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벽 안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외침,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특히 주인공 예르마의 감정, 미쳐가는 과정 - 관객에게 직접 닿지 못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예르마의 삶에서 단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배우들의 대화가 정말로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정도의 스피드로 흘러가고, 두서없는 말을 꺼내기도 하는데, 이런 대화방식이 정말 이웃집 담벼락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여담이지만 오디오가 계속 겹쳐들려서..진짜 평소에 말하는 것마냥 상대배우가 말할 때 다른 배우가 그 대사 끝날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자기 말 말해버림. 영어인데다 자막이 너무 빨리 지나가고 둘이 동시에 얘기할 때는 둘 중 한 사람 말만 해석해놓는 바람에 놓친 대사가 많았음. 너무 아쉬웠다.)

  



 임신 재생산과 임신



 

'출산'에 담긴 이야기출산은 곧 자신을 낳는 것이다. 예르마는 처음 자신의 자궁을 지칭할 때 "재생산기관"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 때까지만해도 아이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사회적 의미가 짙지만, 사회적 시선에 감싸인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이해될 수 있는) 아이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점차 그 생각은 자신을 온전히 보아줄 사람을 갈구하는 근원적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 결국 그는 재생산 기관에 불과했던 장기에, 자기 자신이 먹혀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가 극중 "내가 세상을 만드는게 아니고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고 했던 말은 어쩌면 예르마의 최후를 암시하는 부분이었을 수도 있겠다. 

 

또, 낙태를 했던 경험이 있던 예르마에게는 아이를 갖는 것이 자신의 과거를 새로이 만들어낼 어떤 탄생점?이 될 수도 있었겠다. 자기가 안고 있던 모든 과거의 기억을 새로운 탄생을 통해 자기 자신로 새로 탄생되는 의미도 어느정도 들어있지 않을까. 

 


 

 

 

/ 불모 / 결핍으로 메말라버린 땅

 

 

 

 


예르마의 결핍을 말하기 전에 우선 예르마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자. 예르마는 작은 신문사 사회면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블로그를 통해 광고수입을 얻을 정도로 꽤 블로그가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또 집이 그렇게 잘 사는 편은 아닌 것 같으며(working class라고 얘기하는 걸 보면), 돈에 대한 집착이 있거나 집를 꾸미는 데 큰 열정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언니와 사이가 크게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언니가 전형적인 바람둥이 남편과 연을 끊지 않고 계속 살고 있기 때문. 언니가 남편과 헤어지지 않는 이유는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제일 크고, 또 남편의 아이가 생겨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언니를 예르마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 역시. 언니와 어머니 예르마의 관계는 겉보기에 나쁘지만은 않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원하는 예르마와 언니가 있다.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언니와 예르마 모두 마찬가지 모습인 듯하다. 언니는 남편에게서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아이는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예르마는 어머니에게 안아달라고 하거나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기 때문.

 

그의 캐릭터, -여기서 캐릭터의 의미는 인물이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에게 새겨진(carved) 성향을 말한다. 어떤 상황을 거치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그에 대응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틀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요소라는 의미에서의 캐릭터 말이다.-는 

 

 

이 극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핍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무의식 속에 자리한 결핍으로 인해 어떤 소망을 갖게 되고, 자신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그 소망에 집착하게 되면서 점점 메말라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이는 극이 상황을 진행하는 방식과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 1장부터 예르마는 아이에 대한 소망을 얘기한다. 그 이후 2, 다시 11개월, 11개월이 지났음을 보여주고 관객은 일정 시간을 지난 후 변화해가는 예르마의 모습을 특정 장면을 통해서만 단편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 동안 그가 어떻게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는지, 주변인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기 위해선 예르마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내용 속에서 단서를 꼼꼼히 찾아야 한다. 그 찰나의 대화에서 우리는 예르마가 가진 아이에 대한 열망이 점점 자라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욕심은 예르마의 언니가 아이를 갖게 되면서, 전 애인이 아이가 있음을 확인하면서, 전애인의 새 애인이 또다시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되면서 점점 커진다. 결핍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됐던 감정은 점차 남편에 대한 원망, 사회에 대한 거부 ,자신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면서 점점 깊이를 확장한다. 그의 감정선이 극에 다다랐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왜 아이를 갖고 싶어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이후, 남편이 더 이상 인공수정을 위한 정자기증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예르마는 분노하며 그렇다면 다른 정자를 쓰면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목은 예르마가 왜 아이를 갖고 싶어했는지 자기 내면의 심정을 털어놓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를 광적으로 갖고 싶어하면서도 당신의 정자가 없으면 다른 정자를 가져오면 된다고, 즉 남편의 아이가 아니어도 된다고 소리치는 이유는 사실 예르마가 남편과의 사랑의 결실로써의 아이가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채워줄 존재, 예르마 그 자신만을 바라봐 줄 존재로 아이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극 중에서 "난 괜찮아!" 를 신경질적으로 반복했던 예르마는 결국 자신이 사라지고 자궁만이 자신을 대변하는 상태에 이르러 자궁을 찌름으로써 자신을 살해하고 만다. 

 

  

<감상평>

 

사실 예르마가 갖는 결핍이 어떤....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물론 무의식 속에 자리한 가족애와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겠지만그 점이 의미있게 부각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음을 지적하고어머니가 마지못해 예르마를 안아준 후그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그 일에 대해 어떤 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평이한 다음 대화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임. <-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그런 걸수도 있고..한번 더 보고 싶다ㅠㅠ) 그렇기 때문에 극작이 말하고 싶어했던 메세지가 도대체 뭐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르마가 극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폭우가 내려도 아무것도 싹틔울 수 없었던 땅, 그렇게 텅 비어있던 무대가 아이가 나타나가 소파와 가구, 어질러진 장난감 등으로 가득찬다. 그런 충만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슬프고 어려운 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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